지난 7월 초 고베에 다녀왔다. 재일대한기독교단 교회여성연합회의 연수회 특강에 초대받아서였다. 한적한 고베는 93년에 대지진으로 인해 많은 집들이 피해를 받았지만, 새로 건축된 건물들이 눈에 튀지 않게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깔끔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재일교회여성들이 모였나보다. 합동연수라는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서 주로 5-60대로 보이는 교회여성들이 행사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3-40대 젊은 여성들이 보인다. 여기도 세대교체 바람이 불고 있다. 재일동포사회에 최근 소위 ‘뉴커머’ new comer들이 많아져서 일본에서 낳고 자란 세대와의 갈등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공통점이 있다고 해도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 어려운가보다. 강제병합 100년을 주제로 모인 이들이 여성으로, 기독교인으로,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으로 다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직도 차별이 존재하고 있는 땅, 일본에서 재일동포 2세, 3세로 그들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다.

재일동포의 삶은 한민족의 슬픈 역사와 무관치 않다. 1910년 일본으로 강제합방된 한국의 운명은 이미 재일동포의 운명을 결정했는지 모른다. 그들은 조국 한국에서 살 수 없어 내쫓김을 당해야만 했다. 마치 하갈이 조상의 땅에서 내쫓김을 당해 울부짖어야만 했던 그 울음소리마냥 그들은 자기가 살던 고향을 등지며 일본 탄광으로, 군수공장으로 먹고 살기 위해 떠나야 했다. 강제로 군인군속으로, 학도병으로 떠나 일본에서, 사할린에서, 시베리아에서 한을 품은 채 돌아오지 못하고 유골로 남아야 했던 우리 조상들의 자화상이다.

일제의 식민지로 살았던 36년간의 세월은 일본이나 한국 모두에게 역사적 트라우마를 안겨주었다. 심각한 상처를 받았을 때 나타나는 심리적 외상증후군이 개인의 마음뿐 아니라 우리 역사 전반에 스며있다. 나를 이것을 역사적 트라우마라 일컫는다. 일제 식민지 피해자들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강제동원 피해자들, 원폭 피해자들, 한국인으로 일본의 포로감시원이 되었다가 BC급전범으로 내몰린 사람들 등등 수도 없는 피해자들 마음속 깊이 박힌 트라우마는 종종 피해의식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과격한 민족주의적 반응이 나타난다. 이것 역시 트라우마의 한 현상이다. 트라우마는 피해자에게만 나타나지 않는다. 가해자인 일본정부 역시 해방된 지 60년이 넘어서까지 진상규명 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은 트라우마의 왜곡된 현상 아니겠는가?

역사적 트라우마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과거를 직면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아프다. 남쪽에 있든, 북쪽에 있든, 바다 건너 살아가든 우리들 모두 아프다. 상처가 계속 덧나고 있다. 환부는 곪아터져 여기저기 몸이 더 아프다. 100년이나 지났으면 잊혀질만 하건만 그게 그렇지 않다.

강제병합 100년은 우리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준다. 과거의 100년과 미래의 100년이 우리 모두에게 놓여있다. 과거 100년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아픈 모습이다. 그 아픔의 한복판에 재일동포들이 있다. 앞으로의 100년은 질적으로 다른 전환점을 요청하고 있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일이다. 어쩌면 그 트라우마는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치유될지 모르겠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 매듭을 엮었던 사람이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매듭이 풀리기 어려울 정도로 꽁꽁 묶였다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매듭을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베에서의 이틀은 나에게 새로운 시사점을 안겨주었다. 경계에 선 사람들의 연대라고나 할까? 가해와 피해의 한복판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간의 연대라고나 할까? 그동안 가해와 피해를 나누는 것이 일상이었다면, 가해와 피해를 복합적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해와 피해의 경계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간의 연대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을 찾아보자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 청년들이 하고 있는 브리지 오브 피스 bridge of peace라는 풀뿌리운동에 주목한다. 필리핀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그들을 가해했던 일본 군인들의 증언을 수집하여 가해와 피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일본 청년들의 뜻이 갸륵하다. 이 같은 매개자들이 많아질수록 역사적 트라우마가 극복되기 쉬워질 것이다.

올해 8월 29일 한국에서 한일시민공동선언대회가 열린다. 일본에서 8월 22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사 속에서 한일시민단체들은 공동선언을 통해 강제병합 100년을 되돌아보고 미래 100년을 내다보는 한일시민간의 중요한 원칙을 마련할 것이다. 이 선언이 상징적 의미가 아닌 역사적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실질적인 실의 지침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