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순, 공동체성서연구

 

 


9/2011

 

 

 

 

 

 

 

 

 

 

 

 

영혼의 논리와 언어

 

영혼의 종교(The Soul's Religion) (91)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

토마스 무어 지음






 


우리의 대중 종교는 성실하며 포괄적일 수 있다. 그 모든 경쟁적 질투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세속주의를 뒤로 하고 공연과 예술과 기도가 노동이나 상업과 마찬가지로 공통적이며 자연스러울 수 있는 다른 종류의 문화를 일굴 수도 있다. 그런 세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돌보며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는 비전을 가질 수 있다.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이 분리되어 있는 현재의 조건들 속에서는 정치, 기업 그리고 문화형성의 다른 측면들 속으로 도덕성을 끌어들일 효과적인 동기부여의 가능성은 없다.

노이로제도 이기심도 없이 철저히 세속적이려면 영성의 관점이 필요하다. 영성이 없는 세속성 secularity은 광신 religi- onism과 혼합된 세속주의이다. 이는 치명적인 등식이다. 현재 우리가 세속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을 분리시키는 한, 세속적 실존의 온전한 즐거움에 접근하기는 어렵다. 일상생활에 영적 상상력이 결여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자연과 문화의 온전한 영향력을 배제하는 이기심이다. 모든 전쟁과 범죄와 경쟁심 때문에 세속 생활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경제적 문화적 풍요를 온전히 누릴 가능성이 별로 없다.

여기에 대단한 역설이 있다: 즉, 우리는 삶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향유하기 위하여 힘찬 영성적 실존이 필요하다. 물론 여러 종교들이 이제껏 완전히 다른 관점을 흔히 제시해왔다. 그러나 그렇게 된 까닭은 종교가 그리도 많은 방식으로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분열된 속에 붙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폭넓게 내다보면서 경쟁적인 영적 전통들을 넘어서서 나아가야 할 일이 어떨 것인지, 그리고 세속적 삶의 온갖 기쁨에 온전히 참여하도록 해 줄 영적 비전과 가치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어떨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이 세계는 결론이 아니다.
후편은 너머에 있다.
음악처럼 보이지 않으나,
음향처럼 분명하다.

에밀리 딕킨슨 Emily Dickinson, 'This world is not conclusion.'

40. 영원한 생명

우리는 완전히 한 바퀴 돌아서 비움과 영성 비전의 핵심부로 돌아온다: 즉, 죽음의 미스테리와 사후생 life after death으로 회귀한다. 필경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그 문제는 수행에 관한 논의에 적합하다. 그리고 앞서 다뤘던 영적 세속성의 주제와도 연결된다. 물론 알고 싶기는 하지만,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사후에 무슨 일이 생기는가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문제이다.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말 할 수 있는 세련된 방법이 있을까?

지난 십 여 년 동안 영혼의 본질을 탐구한 사람으로서 나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해 질문한 것은 내가 사후생과 불멸에 관하여 무슨 생각을 하는가였다. 나는 솔직히 내가 삶의 근거로서 영혼과 이런 경험의 심층적 차원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고 말하면서 항상 그 질문을 회피하였다. 그러나 최근 나도 육십 고개를 넘어선 나이가 되어서 나는 이미 다른 느낌을 갖게 되었다. 나는 죽음에 대하여 걱정은 안 하지만, 아직 열 살이 채 안 된 내 딸과 나보다 열다섯 살 아래인 내 아내와 나의 어린 대자 godson에 대해서는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과 떨어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제는 불멸과 영혼의 문제를 한 발짝 비켜서기는 싫다.

누구라도 제한이 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나의 견해는 불멸은 뭔가 이승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신학 이론을 한 마디 안 해도, 그것은 어떤 관념 속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하여 날마다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것은 공포, 경이, 희망, 불신 같은 것으로 아주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거나 드러내는 노력을 할 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몇 마디 위로의 말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인간의 조건, 즉 바로 이승의 삶에 참여하는 우리의 필수조건의 일부처럼 보인다. 사실의 확실성을 가지고 내세에 대하여 아는 것은 없으면서 그렇다. 이 지점에서 종교는 성패가 갈라진다. 미지의 세계를 직면한 상태에서 위로하는 망상을 줄 것인가 아니면 순전한 희망을 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사후생에 관한 나의 답은 단순하지 않다. 플라톤이 일찍이 말하기를 철학자들은 평생을 명상/관상 contemplation 하고 살면서 죽음 준비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히 죽음 준비만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수없이 많이 있다. 나에게는 가족 사랑이 불멸을 맛보는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길지라도 그 사랑을 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를 들자면, 베토벤은 7번 교향곡,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그리고 J. S.바하의 피아노 협주곡 하는 것처럼 황홀하게 아름다운 것을 역시 내가 이승의 잡다한 일들로부터 뚝 떠나서 영원이 어떤 것일지 그런 것에 대한 사인을 보여준다. 크고 작은 결정 가운데 진정으로 윤리적 결정을 내리게 되면 이기심의 감방에서 해방되고 자아의 영원성을 일별하게 된다.

내가 늘 저술이나 강연에서 항상 추구하는 사랑, 아름다움, 공동체, 창의성 그리고 심지어 통찰력 같은 것 모두가 나로 하여금 계속 살아가도록 용기를 북돋우어 준다. 그런 것들이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끌어내어 세상 속으로, 그리고 엄청난 성취를 이루는 데로 가게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오직 나 자신으로부터 탈출해야 진정으로 내가 누구며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종교적 황홀경의 본질이며, 그 말 자체는 밖에 서는 것 standing out을 뜻한다. 그저 달콤한 정서가 아니라 내가 물리적 존재 그 이상임을 배우는 그런 존재의 상태이다. 이승에서 나 자신을 초극할 때마다 나는 최종적 초극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불멸을 다루는 세 가지 방식을 상상한다. 이승에서의 삶 그 이상은 더 없다고 결정할 수도 있다. 죽음은 끝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가운데 내가 존경하고, 나보다 훨씬 머리가 좋은 사람들도 이런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건 약간 방어적이란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뭔가 잘못하는 일은 아예 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질문을 막아버린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경이는 생명으로 가득하다. 그런 것이 상상력과 함께 마음을 생생하게 살아있도록 만들어준다.

다른 반응은 이와 정반대다. 지성적이며 성실한 사람들은 이승 너머에 생명이 있다고 단순히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것을 세부적으로 서술한다. 어떤 사람들은 임사경험이나 그와 유사한 것들 속에서 힌트와 증명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 역시 내 보기에는 약간 방어적이다. 불멸에 대한 물질주의적 회의론과 마찬가지로 이처럼 명백히 더 영적인 것으로 보이는 방식도 불안하게 보이거나 주장이 더욱 강한 것처럼 들린다. 이것 역시 논의를 막아버리고, 그렇기 때문에 경이보다는 자기방어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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