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사 새옹지마 塞翁之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일은 변화가 많아서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딱 알맞은 예가 있습니다. 어린 동생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렸던 형들이, 이제는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 앞에 엎드려 자기들을 종으로 삼아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이 그러합니다(창44:18-34). 야곱의 아들들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이집트에 양식을 구하러 왔다가 예기치 못한 함정에 빠졌습니다. 함께 온 막내 베냐민의 곡식자루에서 요셉이 귀하게 쓰는 은잔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베냐민은 요셉의 은잔을 훔친 죄로 죽거나 종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됐습니다.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고 꼼짝 없이 걸려든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의 발아래 엎드려 제발 막내 동생 베냐민을 돌려보내고 대신 자기들을 종으로 삼아달라고 애걸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어찌 됐든 요셉 앞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요셉을 미워할 때의 흉악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동안 어린 동생 요셉을 팔아버리고 죄책감에 시달렸던 게 분명합니다. 루터는 이때 유다의 간청을 ‘기도의 표본’이라고 추켜세우고 있습니다(카일-델리츠, 창세기 주석, p.414). 기도에 들어 있어야만 하는 참된 감정이 온전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본 것입니다.

마가 역시 유다의 간청만큼이나 절박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죽어가는 딸 이야기입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의 이야기는 회당장의 죽어가는 딸을 살리는 이야기 중간에 마치 삽화처럼 끼어 있습니다(막5:25-34). 죽어가는 아이는 이제 12살 소녀이고,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습니다. 유대 나이로 12세라면 이제 결혼하여 황금 같은 시절을 맞이할 나이에 그만 꽃 봉우리가 피지도 못하고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고, 여인의 12년이란 한창 생산할 인생 최고의 절정기를 부정한 병으로 질시와 모멸 가운데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지가 절망적이라는 점에서 두 여인은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사회적 배경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길에 서 있습니다. 죽어가는 소녀에게는 아버지가 회당장이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습니다. 그러나 혈루증 앓는 여인에게는 그녀의 질병을 이용하여 돈을 갈취해먹은 기생충 같은 자들뿐입니다. 세상은 힘 있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힘없는 사람은 가혹하게 다루며 등쳐먹는 비루한 인간이 참으로 많습니다.

당시 회당장은 마을의 유지였습니다. 상류층은 못되어도 중산층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의지할 데 없는 가난한 민중입니다. 이들의 신분은 각기 다른 태도에서도 드러납니다. 회당장은 예수 ‘앞에’ 나와서 간청하지만, 여인은 예수 ‘뒤에’ 서서 겨우 옷깃이나 만지고 있습니다. 마가가 이처럼 각기 다른 신분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두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 당시 ‘하나님의 신부’여야 할 유대 백성들이 처한 절망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 마가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유대나라는 이미 로마에 굴종하는 신세가 됐고, 백성의 지도자라는 자들은 마치 회당장처럼 병들어 죽어가는 자기 딸도 구원하지 못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가난한 민중이든, 지도층 사람이든 다 같이 깊은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서도 도움을 구할 데가 없었습니다. 이럴 때 죽어가는 ‘하나님의 신부’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살리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음을 마가는 증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가는 이 두 이야기를 결합시킴으로서 총체적인 절망의 상황에서 민중이라는 단일 초점을 비켜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민중에 대해서는 어리석음과 무지를, 지도층에 대해서는 교만과 무능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부자도 있고, 가난한 자도 있습니다. 권세 있는 자도 있고, 힘없는 민중도 있습니다. 유능한 자도 있고, 무능한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구원받아야 할 유약한 존재입니다. 힘 있는 형들이 노예로 팔아버린 동생 앞에 엎드려 구원을 청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가난한 민중의 입장에서 불의한 세상은 바뀌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민중의 행위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부자 가난한 자가 다 같이 구원의 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부자나 가난한 자나 다 같이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자비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